|
김남조 시인 소개
출생 : 1927년 9월 26일 출신지 : 대구광역시 직업 : 시인 학력 : 서울대학교 가족 : 남편 조각가 김세중 데뷔 : 1950년 연합신문 '성숙', '잔상' 발표 경력 : 2000년 6월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1998년 한국방송공사 이사 수상 : 2007년 제11회 만해대상 문학부문 2000년 제2회 자랑스런 미술인상 공로부문 대표작 : 사랑은 고백할 때조차 비밀로 남는다,
영혼과 가슴
|
시집 〈나아드의 향유>(1955)에서부터
종교적 사랑과 윤리를 읊었다. 그후 시집 <나무와 바람>(1958)
〈정념의 기(旗)>(1960)〈영혼과 빵>(1973) 〈김남조시전집〉(1983)〈너를 위하여>(1985)·
〈깨어나 주소서 주여>(1988)
|
|
그대있음에
그대의 근심이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마음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
고백
열. 셀때까지 고백하라고 아홉. 나 한번도 고백해 본적 없어 여덟. 왜 이렇게 빨리세? 일곱. ..... 여섯. 왜때려? 다섯. 알았어. 있잖아 넷. 네가 먼저 해봐 셋. 넌 고백 많이 해봤잖아 둘. 알았어 하나반. 화내지마 ..있잖아 하나. 사랑해
|
|
그림엽서
여행지 상점가에서 그림엽서 몇 장 고를 때면 별달리 이름 환한 사람 하나 있어야겠다고 각별히 절감한다
이국의 우표를 붙여 편지부터 띄우고 그를 위해 선물을 마련할 것을
이 지방 순모실로 짠 쉐타 하나, 목도리 하나, 수려한 강산이 순식간에 다가설 망원경 하나, 유년의 감격 하모니카 하나, 최소한 일년은 몸에 지닐 새해 수첩 하나, 특별한 꽃의 꽃씨 잔디씨, 여수(旅愁)서린 해풍 한 주름도 넣어 소포를 꾸릴 텐데
여행지에서 그림엽서 몇 장 고를 때면 불켠 듯 환한 이름 하나의 축복이 모든 이 그 삶에 있어야 함을 천둥 울려 깨닫는다
|
6월의 시
어쩌면 미소짓는 물여울처럼 부는 바람일까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언저리에 고마운 햇빛은 기름인양 하고
깊은 화평의 숨 쉬면서 저만치 트인 청청한 하늘이 성그런 물줄기 되어 마음에 빗발쳐 온다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또 보리밭은 미움이 서로 없는 사랑의 고을이라 바람도 미소하며 부는 것일까
잔 물결 큰 물결의 출렁이는 바닷가도 싶고 은 물결 금 물결의 강물인가도 싶어
보리가 익어가는 푸른 밭 밭머리에서 유월과 바람과 풋보리의 시를 쓰자 맑고 푸르른 노래를 적자
|
|
너를 위하여
나의 밤기도는 길고 한가지 말만 되풀이 한다 가만히 눈 뜨는건 믿을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피어난 빛들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머리 풀어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것은 잊어 버리고 못다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
상사 (想思)
언젠가 물어보리
기쁘거나 슬프거나 성한 날 병든 날에 꿈에도 생시에도 영혼의 철사줄 윙윙 울리는 그대 생각
천번 만번 이상하여라 다른 이는 모르는 이 메아리 사시사철 내 한평생 골수(骨髓)에
전화(電話)오는 그대 음성
언젠가 물어보리 죽기전에 단 한번 물어보리 그대 혹시 나와 같았는지를....
|
|
그림엽서
여행지 상점가에서 그림엽서 몇 장 고를 때면 별달리 이름 환한 사람 하나 있어야겠다고 각별히 절감한다
이국의 우표를 붙여 편지부터 띄우고 그를 위해 선물을 마련할 것을
이 지방 순모실로 짠 쉐타 하나, 목도리 하나, 수려한 강산이 순식간에 다가설 망원경 하나, 유년의 감격 하모니카 하나, 최소한 일년은 몸에 지닐 새해 수첩 하나, 특별한 꽃의 꽃씨 잔디씨, 여수(旅愁)서린 해풍 한 주름도 넣어 소포를 꾸릴 텐데
여행지에서 그림엽서 몇 장 고를 때면 불켠 듯 환한 이름 하나의 축복이 모든 이 그 삶에 있어야 함을 천둥 울려 깨닫는다
|
5월의 연가
눈길 주는 곳 모두 윤이 흐르고 여른여른 햇무리 같은 빛이 이는 건 그대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버려진 듯 홀로인 사양(斜陽)의 창가에서 얼굴을 싸안고 눈물을 견디는 마음은 그대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발돋움하며 자라온 나무들 땅에 드리운 그 눅진 그림자까지 초록빛 속속들이 잦아든 5월
바람은 바람을 손짓해 바람끼리 모여 사는 바람들의 이웃처럼 홀로인 마음 외로움일래 부르고 이에 대답하며 나섰거든 여기 뜨거운 가슴을 풀자
외딴 곳 짙은 물빛으로 성그러이 솟아 넘치건만도 종내 보이지 않는 밤의 옹달샘같이
감청(紺靑)의 물빛 감추고 이처럼 섧게 불타고 있음은 내가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
|
밤 편지
편지를 쓰게 해다오.
이날의 할말을 마치고 늙도록 거르지 않는 독백의 연습도 마친 다음 날마다 한 구절씩 깊은 밤에 편지를 쓰게 해다오.
밤 기도에 이슬 내리는 적멸을 촛불빛에 풀리는 나직히 습한 악곡(樂曲)들을 겨울 침상(枕上)에 적시이게 해다오 새벽을 낳으면서 죽어가는 밤들을 가슴 저려 가슴 저려 사랑하게 해다오.
세월이 깊을수록 삶의 달갑고 절실함도 더해 젊어선 가슴으로 소리내고 이 시절 골수에서 말하게 되는 걸 고쳐 못쓸 유언처럼 기록하게 해다오 날마다 사랑함은 날마다 죽는 일임을 이 또한 적어두게 해다오.
눈 오는 날엔 눈발에 섞여 바람 부는 날엔 바람결에 실려 땅 끝까지 돌아서 오는 영혼의 밤외출도 후련히 털어놓게 해다오.
어느 날 밤은 나의 편지도 끝날이 되겠거니 가장 먼 별 하나의 빛남으로 종지부를 찍게 해다오 그 사람
|
빗물같은 정을 주리라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 줌 뿌리면 솜털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 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 것도
무상(無償)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
|
다시금 봄날에
가랑잎 나의 영혼아
만국(晩菊) 한 송이 물오리처럼 목이 시린 조락의 뜰에 너 함께나도 볼이 젖는다
그 전날 그 푸른 산바람 해설픈 초원에 떠놀던 여른여른 눈여린 고운 불수레 하며 멀리 메아리져서 돌아들 오던 그리운 노래 그리운 이름
펴며 겹치며 드높이 손짓하는 송이 송이 탐스런 떼구름들 네가 그들을 얼마나 가슴 바쳐 사랑했음인가를 내가 안다
지금은 땅에 떨어져 매운 돌부리에 찢기우는 너여 가랑비 보슬보슬 내림과 같고 소물소물 살눈썹이 웃음과 같은 네 달가운 모든것 오직
그들 호사스런 계절의 풍요한 아름다움 앞에 바친 푸른 찬가 헌신이던걸 내가 안다
그러나 지금은 가야지 지금은 누감고 고이 가야지 지열이 돌아오는 어느 봄날에 다시금 어린아이처럼 손 흔들며 깨어나리라
찬서리 소리도 없이 내리는 뜰에 핏줄기 얼음 어는 가랑잎 내 헐벗은 영혼아
|
가난한 이름에게
이 넓은 세상에서 한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여인을 만나지 못해 당신도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까
검은 벽의 검은 꽃 그림자 같은 어두운 향료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겨울 밤 고독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때문에 어딘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때문에 때로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라는 가난한 이름에 고독도 과해서 못가진 이름에 울면서 눈감고 입술을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
|
年賀狀(연하장)
설날 첫 햇살에 펴 보세요
잊음으로 흐르는 망각의 강물에서 옥돌 하나 情(정) 하나 골똘히 길어내는 이런 마음씨로 봐 주세요
年賀狀(연하장), 먹으로 써도 彩色(채색)으로 무늬놓는 편지 온갖 和解(화해)와 함께 늙는 懷抱(회포)에 손을 쪼이는 편지
제일 사랑하는 한 사람에겐 글씨는 없이 目禮(목례)만 드린다
|
아침기도
목마른 긴 밤과 미명의 새벽길을 지나며 싹이 트는 씨앗에게 인사합니다
사랑이 눈물 흐르게 하듯이 생명들도 그러하기에 일일이 인사합니다
주님 아직도 제게 주실 허락이 남았다면 주님께 한 여자가 해드렸듯이 눈물과 향유와 미끈거리는 검은 모발로써 저도 한 사람의 발을 말없이 오래오래 닦아 주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엔 이 한 가지 소원으로 기도드립니다
|
|
가을의 기도
신이시여 얼굴을 이리 돌리옵소서
못내 당신 앞에 벌받던 여름은 가고 기도와 염원으로 내 마음 농익는 지금은 가을
노을에 젖어 고개 수그리고 긴 생각에 잠기옵느니 여기 이토록 아름차게 비워진 나날 가을엔 기도드려야 하겠습니다 신이시여 가을엔 기도드리게 하옵소서
바람 속에서 바람에 불리우다 불현듯 더워오는 눈시울 주체할 길 바이 없느니 이제금 홀로인 그분과 나와
가을엔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신이시여 가을엔 사랑하게 하옵소서
경건히 보다 경건히 요적의 눈빛으로 마주 바라보는 계절은 가을
신이시여 당신과 나 사이에 그분과 나 사이에 한 아름의 들국화를 두게 하옵소서 보랏빛과 흰빛의 소담스런 국화가 피어도 있고 피면서도 있게 하옵소서
가을은 돌아가는 계절 푸른 하늘 아래 나도 몰래 내가 멈춰서는 계절
문득 멈춰서서 다시 보면 나는 혼자인 나 가을은 제각기 혼자인 계절
신이시여 얼굴을 이리 돌리옵소서
|
너에게
아슴한 어느 옛날 겁劫을 달리하는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알뜰한 내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아비의 피 묻은 늑골에서 백년해로의 지어미를 빚으셨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옛 사연이나 아니었을까
풋풋하고 건강한 원시의 숲 찬연한 원색의 칠범벅이 속에서 아침 햇살마냥 피어나던 우리들 사랑이나 아니었을까
불러 불러도 아쉬움은 남느니 나날이 새로 샘솟는 그리움이랴, 이는 그날의 마음 그대로인지 모른다
빈방 차가운 창가에 지금이사 너 없이 살아가는 나이건만
아슴한 어느 훗날에 가물거리는 보랏빛 기류같이 곱고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다시금 남김없는 내 사람일지도 모른다
|
|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누구든이 아니라 마음이 통하고 눈길이 통하고 언어가 통하는 사람과 잠시만이라도 같이 있고 싶습니다
살아감이 괴로울 때는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힘이 생깁니다 살아감이 지루할 때면 보고픈 사람이 있으면 용기가 생깁니다
그리도 사람은 많은데 모두 다 바라보면 멋쩍은 모습으로 떠나가고 때론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외면합니다.
사람이 만나고 싶습니다 친구라고 불러도 좋고 사랑하는 이라고 불러도 좋을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
평안을 위하여
평안 있으라 평안 있으라 포레의 레퀴엠을 들으면 햇빛에도 눈물난다 있는 자식 다 데리고 얼음벌판에 앉아 있는 겨울 햇빛 오오 연민하올 어머니여
평안 있으라 그 더욱 평안 있으라 죽은 이를 위한 진혼 미사곡에 산 이의 추위도 불 쬐어 뎁히노니 진실로 진실로 살고 있는 이와 살다 간 이 앞으로 살게 될 이들까지 영혼의 자매이러라
평안 있으라
|
|
가고 오지 않는 사람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나중에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
평행선
우린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헤어져 본 적도 없습니다.
무슨 인연으로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는 거리를 두고 가야만 합니까.
그는 나를 부르며 나는 그를 부르며 스스로를 부르며 가야만 합니까.
우린 아직 하나가 되어 본 적은 없지만 둘이 되어 본 적도 없습니다.
|
|
모래시계
청모시 얼비치는 새맑은 아침 모래시계 사륵사륵 수정알갱이 소리 세월이 쌓이는 소리
진보라, 연지빛이 타는 노을녘 모래시계 사륵사륵 마음도 물드는 소리 세월이 더하는 소리
잠없는 깊은 밤의 소슬한 달빛 모래시계 사륵사륵 금실편지 오는 소리 세월 더욱 깊은 소리
|
항구
하세월 표류해 온 나의 일엽편주가 뱃전 스치고 다시 떠나노니 만약에 예서 추운 이를 만나거나 눈매 글썽이는 따뜻한 사람을 알았더라면 나는 기슭에 배를 두고 뭍에 올랐으리라 내 배는 바닷길 만경창파에 흘려 보냈으리라
|
|
연가
잠든 솔숲에 머문 달빛처럼이나 슬픔이 갈앉아 평화론 미소되게 하소서
깍아 세운 돌기둥에 비스듬히 기운 연지빛 노을의 그와 같은 그리움일지라도 오히려 말 없는 당신과 나의 사랑이게 하소서
본시 슬픔과 간난은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짙푸른 수심일수록 더욱 연연히 붉은 산호의 마음을 꽃밭처럼 가꾸게 하소서
눈물과 말을 가져 내 마음을 당신께 알리려던 때는 아직도 그리움이 덜했었다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저 돌과 같은 침묵만이 나의 전부이오니
잊음과 단잠 속에 홀로 감미로운 묘지의 큰 나무를 닮아 앞으론 묵도와 축원에 넘쳐 깊이 속으로만 넘쳐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이여
|
겨울 애상
올해 유달리 폭설과 얼음에 뒤덮인 겨울 그래 따뜻해지려고 저마다 기억해 내는 가슴 하나 난파한 바다에서도 가시처럼 못 삼킬 이름 하나
나는 육십 평생을 뭘하며 살았나 내게 와 쉬려고 혹은 영 눈감으려고 먼 세월 되짚어 찾아오는 옛사랑 하나 없으니
죄스러워라 눈과 얼음 덮인 흙의 살결에도
초록액체의 새순들 자랄 것이어늘 사람 한 평생을 허락받아 살면서 어쩌자고 참사랑 하나조차 못 가꾸어
겨울 지나도록 이렇게 혼자 봄이 와도 다시 그 후에도 나는 혼자일 것인가
|
|
겨울에게
들어오너라 겨울, 나는 문고리를 벗겨둔다
삼복에도 손발 몹시 시렵던 올해 유별난 추위 그 여름과 가을 다녀가고 너의 차례에 어김없이 달려온 겨울, 들어오너라
북극 빙산에서 살림하던 몸으로 한둘레 둘둘 말은 얼음 멧방석쯤은 가져왔겠지 어서 펴려무나 겨울,
울지도 못하는 얼어붙은 상처 얼얼한 비수자국. 아무렴 투명하고 청결한 수정 칼날이고말고 거짓말을 안 하는 진솔한 네 냉가슴이고말고 아아 그러면서 소생하는 새봄을 콩나물 시루처럼 물 주며 있고말고
하여간에 들어오기부터 해라 겨울,
|
겨울 바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海風)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虛無)의 불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
|
항구
하세월 표류해 온 나의 일엽편주가 뱃전 스치고 다시 떠나노니 만약에 예서 추운 이를 만나거나 눈매 글썽이는 따뜻한 사람을 알았더라면 나는 기슭에 배를 두고 뭍에 올랐으리라 내 배는 바닷길 만경창파에 흘려 보냈으리라
|
우편물
내가 못 가는 곳에도 나의 책은 우표 붙이고 간다 책갈피 첫머리 저편 이의 이름을 쓰곤 시린 손을 잠시 댄다 가서 안부 전하고 호젓이 그 옆에 오래 머물라고 그가 외로울 땐 그 더욱 옆에 꼭 있으라고 마음 깊은 당부도 안 보이게 함께 간다
|
|
베틀에 앉아
대문 밖에서 애들끼리 어울려 잘 놀다가 슬며시 혼자 집에 들어와 엄마 한번 보곤 공연히 물 마시고 웃으며 다시나가 노는 옛시절의 한국 아이같은 얄궂은 도령있어 늙으막 내 얼굴을 더러 꼭 보자하네
봄 한철 배틀에 앉아 햇살에서 잣은 실로 비단을 짜서 내 몰골 가려두고 옷 한벌 지어 내 밀까나
|
먼 축원
그곳 평안하시면 그 좋은 일의 좋은 그림자 나에게 드리우고 은은한 가얏고 소리 울리면서 그곳 두르고 남은 노을 한 자락이 이 세상 하늘 화선지에 넉넉히 번지이네
하루는 한몸 내외인 걸 낮과 밤으로 쪼개져 세월 허전하게 쌓이고 그러다 어느 날은 못 만나는 천지간이어도 함께 있는 안도를 일깨우느니 인간사 깊어지면 상당히는 좋고 고마운 갖가지를 더디게 일깨우느니
|
|
가을 햇볕에
보고 싶은 너 가을 햇볕에 이 마음 익어서 음악이 되네
말은 없이 그리움 영글어서 가지도 휘이는 열매, 참다 못 해 가슴 찢고 나오는 비둘기떼들,
들꽃이 되고 바람 속에 몸을 푸는 갈숲도 되네
가을 햇볕에 눈물도 말려야지 가을 햇볕에 더욱 나는 사랑하고 있건만 말은 없이 기다림만 쌓여서 낙엽이 되네
아아 저녁 해를 안고 누운 긴 강물이나 되고지고
보고 싶은 너 이 마음이 저물어 밤하늘 되네
|
행복(幸福)
새와 나, 겨울나무와 나, 저문 날의 만설(滿雪)과 나, 내가 새를 사랑하면 새는 행복할까 나무를 사랑하면 나무는 행복할까 눈은 행복할까
새는 새와 사랑하고 나무는 나무와 사랑하며 눈송이의 오누이도 서로 사랑한다면 정녕 행복하리라
그렇듯이 상한 마음 갈피갈피 속살에 품어주며 그대와 나도 사랑한다면 문득 하느님의 손풍금소리를 들을지 몰라 보석(寶石)의 귀를 가질지 몰라
|
|
서녘
사람아 아무러면 어때
땅 위에 그림자 눕듯이 그림자 위에 바람 엎디듯이 바람 위에 검은 강 밤이면 어때
안 보이면 어때 바다 밑 더 패이고 물이 한참 불어난들 하늘 위 그 하늘에 기러기떼 끼럭끼럭 날아가거나 혹여는 날아옴이 안 보이면 어때
이별이면 어때 해와 달이 따로 가면 어때 못 만나면 어때 한 가지 서녘으로 서녘으로 잠기는 걸
|
가고 오지 않는 사람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것은 아닙니다. 먼저 사랑을 건넨 일도 잘못이 아님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수 없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진정으로 사랑하여 가장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
|
너의 집
너의 집을 지어주마 사랑하는 사람아 은밀하여 누구도 못 찾을 곳에 이승의 쉼집을 마련해주마 동서남북 문을 내고 문들 사철 열어두는 집
살다가 살다가 세상이 손을 놓아 너 혼자인 날엔 문설주에 손자국 없어도 와 있곤 하겠느냐 한밤의 목마름과 못 고칠 미운 짓거리까지도 아아 너의 모든 것 예 와서 담겨주겠느냐
아무도 안 산다 싶은 곳에 바람은 능히 살고 아무도 안온다 여길 때에 그리움 물밀 듯이 너의 집에 너 머물면 내 하늘 절로 달밤이리
너의 집을 지어주마 사랑하는 사람아 옷고름을 풀 듯이 세상살이 골병들을 풀어 버리고 엊그제 몸살도 지워 버리고 쉬어라 쉬어라 설핏이 보기만도 눈물나는 나는 넉넉한 두 팔 되어 그 울타리 둘려주마
|
아름다운 세상
신을 위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보이지 않는 깊고 높은 것 그 확신을 위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사람을 위하여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을 위하여 고독한 의지와 사랑 준령의 등반을 위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생명 있는 모든 것을 품속에 안아주는 자연을 위하여 죽은 후에도 영원히 안고 있는 대지를 위하여 땅의 남편인 하늘을 위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태어날 아기들과 미래의 동식물을 위하여 이름없는 거 잊혀진 거 미지의 것을 위하여 가급적 다수를 위하여
그러고 보니 모든 걸 위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
|
아름다운 세상
신을 위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보이지 않는 깊고 높은 것 그 확신을 위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사람을 위하여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을 위하여 고독한 의지와 사랑 준령의 등반을 위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생명 있는 모든 것을 품속에 안아주는 자연을 위하여 죽은 후에도 영원히 안고 있는 대지를 위하여 땅의 남편인 하늘을 위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태어날 아기들과 미래의 동식물을 위하여 이름없는 거 잊혀진 거 미지의 것을 위하여 가급적 다수를 위하여
그러고 보니 모든 걸 위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
서 시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가 없습니다 요행이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가 됩시다
사랑하던 이를 미워하게 되는 일은 몹시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설혹 잊을 수 없는 모멸의 추억을 가졌다 해도 한때 무척 사랑했던 사람에 대해 아무도록 미움을 품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